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답변
춤(예술)은 망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쩌면 세상은 이미 망해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곤 합니다. 살벌한 노동 환경과 주거환경, 계급의 고착과 심화, 극우파의 득세, 혐오와 차별, 정상성에 대한 전사회적 집착, 거기 올라타지 못한 사람들이 느끼는 박탈감과 우울감 등등, 살아남기 너무 힘든 세상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100년전에도, 1000년전에도 세상은 언제나 살아남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종교가 가혹한 세상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었고요. 저는 역사를 전공했는데, 어떤 책에서는 초기 이슬람 시대에, 소규모 이슬람 전사들이 중동을 휩쓸어버릴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해요. 이제껏 인류는 자신의 노력이 인생에 의미를 가져다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때 역경을 견뎌내왔고, 사람들은 자신을 계시적인 한편의 극에서 주요 등장인물로 만들어주는 거대 서사에 휩쓸리면 인생을 바치게 된다구요.
최근까지도 여전히 종교(사상은) 그런 힘이었습니다. 제 2차 세계대전 때, 러시아 사람들은 앞다투어 전쟁에 나가고 싶어 안달을 냈고, 장애와 성별을 숨기면서 전투지로 가는 열차에 숨어들기까고 했었다고 합니다. 거대한 적과 싸운다는 믿음이, 살악는 힘이었던 것이죠.
그러나 2024년의 저희는 더 이상 종교에 기댈 수 없습니다. 앞서 2차 세계대전 군인들의 이야기는, 생존 군인들의 증언을 담은 책에서 읽은 것이었는 데요. 다들 앞다투어 달려간 전장은, 사실은 나와 똑같이 생긴, 나보다 어린 적들이 죽어나가는 곳이었으며, 전쟁이 끝나자, 국가도 사회도 그들을 부끄러워하고 숨기기 바빴다고 말을 합니다. 인생을 바칠, 절대적 진리라 믿었던 것이 아무것도 아닌 종이쪼가리 허상이었다는 것을 모두가 깨닫게 되어버린거에요.
모두가 그걸 알게 되어 버린 이후로, 사람들은 더 방황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뭐 좀 있어보이는 단어를 쓰자면,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포스트 모더니즘이 탄생한 것일텐데, 그냥 쉽게 말해 빨간약을 먹어버린 거라 생각해요. 영화 매트릭스 속 빨간약을 먹어버린 네오처럼, 원래 세상은 의미없고 삶도 그냥 어쩌다보니 일어난 일일 것일 뿐이라는 걸 깨닫게 된거죠.
차라리 빨간약을 먹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그냥 세상에 대한 환상 속에서 살 수 있다면 어땠을까 후회하지만, 이미 빨간약을 먹어버린 이상 이전으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각자 찾아가야만 해요.
그리고 제가 찾은 제 답 중의 하나가 춤이었고, 예술이었습니다. 가산 디지털 단지 역을 가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출근시간 가산디지털단지 역에 서 있으면, 양복 차림의 직장인이 끝도 없이 쏟아져나옵니다. 똑같은 표정, 똑같은 복장의 잿빛의 사람들의 수십, 수백명이 걸어나오고, 저 역시 그 중 한 명이습니다. 똑같은 표정, 똑같은 복장의 톱니바퀴가 된 기분. 그 기분이 끔찍하게 싫었어요.
그럴 땐 춤을 춘다고 상상하며 걷습니다. 무용에서는 가만히 서 있는 것도 춤이고, 걸어가는 것도 춤이잖아요. 발 전체로 땅을 디디면서 균형을 잡고 숨을 내뱉는 감각, 내 이상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동작들 같은 것들이요. 횡단보도 앞에 서서 가만히 서서 숨을 내뱉고 몸을 곧추 세우고 있으면, 공기가 다르게 느껴졌어요. 주말에 거울로 내가 걷는 모습을 한참 관찰하고 내가 얼마나 이상하게 걷는지를 알게 되면, 수십 수백명의 회사원이 있더라도 나는 내 걸음걸이로 걷는 고유한 사람이라고 감각할 수 있습니다. 그 외에도, 제가 앞서 무용을 배우고 싶은 질문에 대해 답변했던, 제가 춤에서 경험했던 많은 것들이 저를 현실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을 줬던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컨택즉흥을 통해 사람들과 안전하게 스킨십하고 관게맺었던 경험이, 사람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게 해준다든가.
애니메이션 “소울”에 보면, 삶 그 이후(이전)의 세계의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어떤 것에 몰입한 사람들은 잠깐 그 사후(사전) 세계로 진입하게 되는데, 뉴욕 거리 한복판에서 전광판을 휘두르는 (춤을 추는) 아저씨가 그 세계와, 현실의 뉴욕을 오가며 살아가는 모습이 나와요. 저는 예술을 하는 것이 그 아저씨처럼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세상은 망해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빨간약을 먹기 이전 세상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이들에게, 예술은, 잠시라도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구요. 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예술을 통해 잠깐 다른 세상에 다녀오는, 그러면서도 현실을 잘 견뎌내는, 소울 속의 아저씨처럼, 출근길 횡단보도 앞에서 춤을 추고 있다고 상상하고 있는 저처럼요.
첨언
춤을 오래 좋아하다보니, 춤을 왜 좋아하는지, 춤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종종 질문을 받고 답변할 일이 있었다. 막연하게 생각하던 것들이 답을 하면서 조금씩 정리되어 지금은 꽤나 정리된 버전이 되었다.
다만 '그래서 춤이 무엇인지', 혹은 '춤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막연하다. 대책없이 낭만적인 말들을 싫어하는데, 그런 추상적이고 낭만적인 말들만 늘어놓게 된다. '춤을 춘다고 상상하면서 걷는다'니 맘에 들지 않는 문장이다. 논문같이 아주 뼛속까지 건조하고 논증으로 빽빽한, 치밀한 답변을 말하고 싶다.
춤을 오랫동안, 찬찬히, 구체적으로 배워본 적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구체적인 경험이 없는데 구체적인 말을 할 수 있을리가 없다. 그래도 이제는 조금씩, 아주 천천히, 매우 구체적으로 배우고 있으니 언젠가는 구체적이고 치밀하게 설명할 수 있겠지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