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꿈을 쓰고

소설을 썼다.

평생 한번도 소설을 써본 적이 없었는데, 우연한 기회로 소설을 쓰게 되었었다. 가수 이승윤의 '가짜꿈'에서 시작된 문장을 이어 쓰는 소설이었다. 나와 다른 사람을 상상할 그릇이 되지 않아서 나를 닮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되풀이해서 다가가는, 그러나 정작 가닿지는 못하는 생각들을 명확한 문장으로 구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푹 빠져서 몇날 며칠 글을 썼다. 내가 나를 만나러 갔다.

'기승전'까지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탈이었다. 문제는 결말이었다. 소설이라 결말을 내야 하는데, 도무지 결말을 어떻게 내야할지 모르겠는 거다. 평소의 나라면, '옳은' 결론을 내리고 덮었을 것이다. 어른답게 행동하는 것이 옳고, 그러므로 춤을 출 시간에 이력서에 쓸 말을 한 줄이라도 더 만드는 것이 맞다고 말이다. 어쩌면 그 결론이 싫어서 끝까지 가지 않고 서성이고만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소설이니까 단정한 결말을 내야 할 것 같았다. 좋은 결말이라기보다는 단정하고 단단한 결말. 결국 춤을 추기로 선택하고, 춤추고 싶은 마음을 인정하는 결말을 썼다. 솔직히 말하면 그 결말을 믿지는 못했다. 더 솔직해져보자. 나는 '함께 춤추다가 드러누워 웃던 연습실'도 /(거의/) 경험해보지 못했지만, 그런 공간을 상상하며 썼다.

언젠가부터 나는 상상하기를 멈췄다. 내가 너무 간절히 원하는 것들을 상상하면, 상상과 현실의 괴리에 더 많이 속상해지기만 할 뿐이다. 언젠가 닌텐도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글쓴이는 어렸을 때 친구들의 닌텐도가 너무너무 부러웠는데, 부모님이 오락기는 절대 사주지 않으셨단다. 부러운 마음에 용돈을 모아서 포켓몬 공략본을 사고, 구석부터 구석까지 너덜너덜해질때까지 외웠지만, 포켓몬 공략본을 외워봤자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피카츄도 뮤츠도 없었고', '오히려 허무해질 뿐이라는 걸 깨닫는데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말한다. 상상은 닌텐도 없이 닌텐도 게임 공략법만 달달 외우는 것과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소설은 그렇게 써야 할 것 같았다. 그냥, 소설이라면 내가 상상하는 그런 공간이 있어야 할 것 같았고, 또 옳은 결말이 아니라 단정하고 단단한 결말이 있어야만 할 것 같아서 활자로 써서 박제했다.

내 소설이 이겼다.

지금은 내게 그런 연습실들이 생겼다.

이수역 9번 출구의 고장난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가 스타벅스를 지나치면 칠이 벗겨진 낡은 흰색 문이 있다. 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면, 퀴퀴한 화장실 냄새가 나고 더러운 마룻바닥이 깔린 연습실이 있다. 이수 안식연습실 4호점. 너무 많이 눌러서 외워버린 자물쇠 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면, 안녕! 사람들이 인사를 한다. 10평 남짓의 작은 공간에서 함께 웃고, 떠들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 겨울에, 봄에, 여름에, 가을에, 그리고 다시 겨울에 그 곳에 갔다.

안식 길 건너 맞은편, 컴포즈 커피 옆에는 디오스페이스가 있다. 훨씬 더 깔끔하고 댄스플로어가 깔린 곳이라 사람들이 좋아한다. 9번출구에서 안식을 지나쳐 5분정도 걸어가면 힐러 연습실이 있다. 아주 깨끗하지는 않아도 훨씬 커서 자주 간다. 안식, 힐러, 파랑홀, 마온, 코스믹스페이스, 킹덤, 쏘울댄스, 이야호, 커먼스페이스, 그리고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수많은 연습실들.

연습실 문을 열고 그 안에 사람들을 볼 때면, 따듯한 빛이 고인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제 연습실에 관해서라면, 아니 연습실 안의 우리에 관해서라면 정말로 밤새 이야기할 수 있다. 연습 초반에는 안무를 익히고, 노래의 음을 익힌다. 중반에 접어들면서 차차 장면연습을 하기 시작한다. 이후에는 공연을 시작하는 조명 IN 부터 마지막 커튼콜 인사까지 전부 런을 돈다. 하루는 시간을 내서 프로필 사진을 찍는다. 연습 틈타 앉아서 수다를 떨고, 내가 나오지 않는 장면에는 뒤편 소파에 앉아 사람들이 연습하는 것을 구경하고, 아무렇게나 누워서 잠을 자기도 한다.(보통 나만 자기는 한다.) 공연 대사는 어느새 밈이 되어 온갖 상황에 갖다 붙이고, 서로의 사진을 아주 많이 찍는다.

오랜만에 파일을 정리하던 와중 이 조악한 소설을 다시 읽었고, 내가 썼던 문장들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작 나는 쓰면서도 믿지 못했는데. 소설에서 주인공은 춤같은 건 전부 가짜라고 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거짓말이더라도 속아 넘어갈때까지 말해주겠다고 말한다. 내가 그런 말을 썼었다니! 마치 내가 믿지 못하는 것을 믿을 때까지 계속 말해주는 나처럼, 이 소설이 나에게 계속 그 말을 해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위의 닌텐도 글쓴이는 어른이 된 지금 자기 돈으로 산 닌텐도로 혼자 게임을 하곤 한단다. 하지만 아무리 게임을 해도, '거기엔 놀라움이나 기쁨을 공유할 친구는 어디에도 없고', '내가 진짜로 바랐던 건, 이제 두번 다시 손에 넣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문장이 꼭 나같아서 잊혀지지 않았다. 소설을 쓰기 전에도 쓴 후에도 쓰면서도 나는 이 문장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소설 속 결말을 원해도 현실에서 그런 결말은 절대 손에 넣을 수 없을걸?

아니, 내 소설이 이겼다. 내가 쓴 가짜 결말이 더 끈질겼다. 함께 춤추다가 드러누워 웃는 연습실 같은거, 나는 손에 넣었다. 독자가 나 한명뿐인 이 어설픈 소설이 대견해졌다. 단단한 말은 물리적 힘이 있는 걸까? 역시 옳은 말이 아니라 단단한 말이 필요한걸까? 사람들이 이래서 소설을 쓰고 읽는구나 싶다. 아직도 나는 자꾸 옳은 말에 붙잡히는 사람이지만, 단단한 말을 쌓고 싶어졌다. 단정하고 단단한 말로 주춧돌을 쌓고 벽돌을 쌓고 집을 지어야지. 또 5년뒤 나를 구해주기를 바라면서.

닌텐도 이야기 속 글쓴이에게도 그런 친구가 생겼기를 바란다. 7살 초등학생으로 돌아가 친구들과 닌텐도를 할 수는 없겠지만, 어른들의 닌텐도 동호회같은 건 어딘가에 있을 법하니까, 누군가와 함께 맥주를 마시면서 몹을 쓰러뜨리고 포켓몬 진화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면서 웃고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