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나를 건국하기

내 ‘문제’가 또 찾아왔다.

누군가 순서를 가르쳐달라고 할 때, 나는 분명히 잘 알고 있고,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분명하게 말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을 하지 못한다. 머릿속에서 과하게 검열하는 것 같다. 내가 알려주면서 더 헷갈리면 어떡하지? 내 동작과 내 설명이 선생님만큼 완벽하지는 않을텐데 보고 잘못 배우면 어떡하지?(정확한 설명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알려주는 것이 ‘잘 모르는 주제에 나대는’ 것 같은데? (분명 동작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 보이는데도) 내가 이걸 말하면 더 헷갈려하지 않을까? 이미 잘 알고 있는데 선넘게 오지랖 부린다고 느끼지는 않을까? 하나씩 점검하다보면 움츠러든다. 그리고 바보같이 나를 깎아내리면서 웃음으로 무마하려고 한다.

순서 뿐 아니라 다양한 상황에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 같다. 공연을 올릴 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짠 안무이고,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출연자들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도 분명히 눈에 보이는데, 말을 못했다. 심지어 회사에서 일을 할 때도 그랬다. 맨바탕부터 내가 기획하고, 내가 구현하고, 내가 채용하고, 매뉴얼을 만들고, 가르치고, 검수하고, 내가 그 누구부보다 잘 알고 있는 내 제품인데도, 가르치고 검수할 때 말을 하지 못했다. 이걸 이야기해도 되나? 꼰대라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이걸 고치면 불편해할까?(내가 했으면 당연히 고쳤을 것이고 고치는 게 맞는데도, 확신을 가지고 있어도 그랬다.)

동료들은 답답해하고, 누군가는 화를 내고, 누군가는 비난 혹은 비판을 하고, 나는 결과를 망친다. 내가 무대를 망쳤다. 나 때문에. 나는 무대를 망치는 사람이다. 나라는 존재가 곧 프로젝트를 방해하는 방해물 자체이다. 그러므로 나는 프로젝트에서 빠지고, 공연에서 빠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하는 존재다.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나의 사회적 책임이다.

물론 말을 고르는 것은 필요하지만, 말을 적절하게 조정한다기보다는 검열하고 가두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이게 내가 실제로 가진 것들보다 나를 훨씬 더 작게 만들고, 깎아내려 우스운 모습으로 만든다. 그래서 손해를 보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나의 존재감을 충분히 존중하고 드러내서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 같다. 회사에서도 그렇고, 곰곰히 따지고 보면 결국 나보다 잘 모르는 사람이 잘 아는 척 이야기해 그의 공으로 넘어간다거나, 내가 모자라 보여서 무시당한다거나 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또, 일단 내뱉는 사람들을 보면 내뱉는 과정 자체가 연습이고, 그렇게 연습이 쌓여 어느순간 정말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많이 극복했고, 아니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까지는 뭐랄까, 대본을 만들기만 했던 것 같다. 일종의 대본을 만들고, 마치 무대에 올라갔을 때 연기하듯 대본대로 하는 것이다. 전화를 할 때는 이렇게, 인턴을 가르칠 때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괜찮고 내가 해도 되는 말들이야. 미리 점검을 끝낸 안전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대본을 두고, 상황이 오면 전원을 켜고 그 대본대로 말을 한다. 미리 검열이 끝난 문장이므로 실시간 검열을 돌리지 않아도 짐짓 적절하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다. 살면서 모든 순간순간에 대본대로 행동할 수는 없다. 이따금씩 경계심이 풀어지면, 기저에 깔린 원래의 태도가 튀어나오고, 그런 순간마다 심리적으로 구석에 몰린다. (아무도 몰아세우는 사람은 없지만) 내가 나를 몰아세워서, 눌리고 쥐어짜지는 느낌이랄까, 아무것도 못하고 얼어붙는다. 트라우마라고 하긴 과한 것 같은데 일단 임상심리사가 트라우마라고 하긴 했다.

특히 춤을 출 때, 이같은 방식으로 위축되는 상황이 더 자주 발생하고, 더 세게 위축된다. 애초에 이 트라우마의 원인이 춤이었으니까, 처음 춤을 배우고 출 때의 경험들로 인해 생긴 트라우마라 그렇다. 춤을 배우는 환경이 문제였다기보단 많은 것들이 맞물려 일어난 일들이긴 하지만 어쨌든 일종의 트리거인 셈이다. 당시의 상황과 겹쳐보이는 상황이 발생하면, 당시의 상황에 느꼈던 공포를 그대로 느끼면서 불안을 느끼는 것.

오늘 이 문제가 또 찾아왔고, 나는 똑같이 공포에 질렸고, 내가 똑같이 공포에 질리는 사람이라는 것에 똑같이 절망했다. 하지만 아주아주 작은, 종이 한 장만큼, 그만큼 다르게 경험한다. 종이 한 장만큼의, 그 차이만큼 다르게 발견하려 애쓴다.

문제가 만든 나를 생각해볼 것. 그게 마음에 든다는 것을 발견할 것.

함부로 넘겨짚지 말 것. 말이 유창한 것은 ‘말이 유창한 것’일 뿐, 사고의 깊이와 다르고 실력의 수준이 높은 것도 아니다. 말이 유창하다고 해서 우러러보지도, 반대로 말이 유창하지 않다고 해서 내려다보지도 말 것.

말을 끝까지 주의깊게, 또 정성들여 들을 것. 상대의 말이 ‘다소 답답하게 느껴지더라도’ ‘자동완성’하려 하지 말 것. 그의 속도와 방식을 존중할 것.

함부로 가르치지 말 것. 상대의 맥락을 존중할 것. 상대의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면, 그 생각을 이미 상대도 하지 않았을지 생각할 것. 이미 상대도 알고 실천하고 있거나, 실천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는 그만의 이유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더 중요한 그만의 맥락이 존재하지 않을까 고려할 것.

이건 세계를 대하는 나의 원칙들이다. 나를 똑같이 찾아와 괴롭히는 이 ‘문제’ ‘덕분에’ 나는 이런 원칙들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말을 못하고 있다고 나를 모자라게 보는 것이 싫어서, 내가 모르는 줄 알고 가르치는 것이 싫어서, 대신 완성하면서 내 말을 뺏고 내 공을 뺏는 것이 싫어서, 다른 사람들도 그럴 거라 생각했다. 내로남불이 되고 싶지 않아서, 내가 대해지길 원하는 방식으로 남을 대하려고 계속 노력했다. 세계를 대하는 나만의 고유한 원칙이 세워졌고, 나는 이 원칙이 친절하기보다는 단호해서, 베풀기보다는 존중하는 것이라 꽤 마음에 든다. 물론, 못 지킬 때도 많지만, 계속해서 따르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렇게 원칙을 따르려는 행동들이 쌓이고 쌓이다보면 언제가 나만의 고유한 결이 새겨져 나의 고유한 태도가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내가 나만의 고유한 결을 새길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문제 ‘덕분’이었다. 어쩌면 이 문제는 문제라기보다는 재료였을 뿐이고, 나는 이 재료를 꽤 멋지게 요리해내는데 성공한 것일지도 모른다.

일단 내뱉기. 일단 부풀리기.

이 ‘문제’가 만들어준 내 태도가 마음에 드는 것도 맞지만, 어쨌든 내가 나아가는데 방해물이 될 때가 많고, 방해물을 뚫고 갈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한 것도 맞다. 무엇보다, 좀더 스스로에게 충실하게 살고 싶어졌다. 내가 나의 존재감을 충분히 존중하고 충분히 드러내고 표현하는 과정 자체를 충분히 하는 것이 그 자체로 삶을 충실하게 잘 살아내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존중하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메타인지가 정확해야 한다. 정확하게 본다는 것은, 실제보다 크게 부풀리는 것도 아니지만, 실제보다 볼품없고 하찮게 보는 것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보는 것이다. 내 경우엔 지금까지는 내가 나를 실제보다 볼품없고 하찮게 보고 있으므로, 실제모습에 영점을 맞추려면 오히려 더 렌즈를 확대해서, 부풀려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를 너무 과하게 포장하는 것도 안되겠지만, 내 경우엔 더 부풀려본다고 과해지지 않고 오히려 부풀려야 실제에 가까워질 것이다.

트라우마가 생겼던 과거의 상황 때문에, 과거의 렌즈로 나를 보았기 때문에 내가 더 작게 보였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나는 안무를 정확하게 알고 있고,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언어 능력도 갖췄다. 5년동안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설명하면서, 또 설명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인지를 정확하게 맞춰가면서 돈을 벌었다. 능력이 있고, 경험도 충분하다. 이제 춤도 오래 배웠기 때문에 춤을 배운대로 추는 것도 많이 해봤다. 따라서 안무를 정확하게 출 수 있고, 또 다른 사람이 물어보다면 정확하게 설명해줄 수도 있다.

나는 춤을 정확하게 출 수 있다. 나는 이 춤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내 일을 잘 알고 있다. 나는 내 일을 설명할 수 있다. 춤을 다른 사람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

다만, 트라우마로 인해 무서워하기 때문에 내뱉지 못할 뿐이다. 위축되어 있을 뿐이다. 내뱉지 못해서, 아는 만큼도 드러내지 못해서, 그 연습이 안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일단 내뱉을 것. 나보다 더 큰 말을 내뱉는 것 같아서 무섭겠지만, 내가 실제로 큰 존재라는 것을 믿을 것. 나는 단지 실제 크기의 나를 내뱉는 것이라는 것을 믿을 것. 그리고 내뱉는 것이 다시 내 것이 될 것, 밖으로 내뱉은 것들은 더 단단해져서 더 단단하게 나를 구성할 것이라는 것을 믿을 것. 그렇게 나를 부풀릴 것.

과거를 다시 경험하기

나는 나도, 내 삶도 마음에 들지 않아 죽고 싶었다. 새롭게 나를 구성하고 싶었다. 다들 과거를 수용하고 과거를 해석하는 방식이 달라지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과거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만으로는 나를 다시 쌓아올릴 수 없다. 다시 경험해야만 한다.

춤을 배우면서 겪었던 과거의 상황을, 춤을 다시 배우면서 다시 겪는다. 같은 상황을 다르게 경험하고 있다. 다른 환경에서 다른 내가 경험하고 인지한다.

지금의 나는 상황을 냉정하게, 하지만 더 정확하게 볼 수 있다. 더 넓은 시야에서 더 많은 것들을 보면서 동시에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과거에 나는 내가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상황을 과장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는 모르고 못하는게 아니라, 겁을 먹어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나를 답답해하며 유창하게 설명하고 이끄는 동료는, 그냥 유창할 뿐이었다. 어떤 면에서 그는 심지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끼어들어 가로채서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때로는 나는 단지 신중하고, 사려깊었던(적어도 그런 태도를 지향했던) 것이었는데, 그것이 모자란 것으로 비난당했던 순간도 있었다. 지금의 나는 그게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모자랐다고 해도 어쩌겠어. 나는 남들보다 느리고 소심하고 위축되어 있었으니까 그랬을 수 있다. 남들보다 춤을 못 췄던 것도 사실이다. 아니 지금도 나는 여전히 신경다양성 스펙트럼 어딘가에 있는 사람이고, 여전히 춤을 잘 추지 못하고, 그로 인해 어떤 사람들에게는 답답하거나 불편한 존재일 수도 있다. 당연히 싫어할 수 있다. 그게 나라는 존재를 비난하거나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나는 사람들에게 더이상 판단을 맡겨두지 않는다. 나를 판단할 최종 권리는 오직 나에게만 있다. 지금의 나는 이것을 안다.

알기 위해서, 그러니까 믿기 위해 아주 많은 시간들을 쌓아왔다. 나는 느리지만 결국 끝까지 붙잡고 쌓았다. 결국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여전히 못할 수는 있지만 처음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만큼은 할 수 있고, 잘 하지는 못해도 정확하게 할 만큼은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상황이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또 더 많은 것들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 휘말리지 않고 나의 리듬으로 대응할 수 있다. 아니, 나는 실제로 같은 상황에서 그렇게 대응했다.

과거를 다시 쓰기. 어떻게?

결국, 같은 상황에서 실제로 다르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다른 나가 생겼다. 물론 과거를 들여다보고, 이해하고, 지금의 나를 쌓아올리는 시간들이 필요했다. 아마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과거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것이 이런 것이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끝맺음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지금의 나가 제대로 해내도 믿기지 않았다. 내가 꽤 컸다는 사실을 인지할 시간도 없었고, 늘 눈앞의 일을 해나가기에 급급했고, 또 아무리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해내도 그건 ‘다른' 일이었을 뿐이다. 원래의 나는 언제고 튀어나와 나를 다시 늘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과거를 단지 이해하거나 수용함으로써, 자기 서사를 다시 쓰는 일이 가능할까? 나는 과거를 문학적으로 재해석하기보다 역사적으로 재해석하고 싶었던 것 같다. 역사적 재해석이란 객관적 실체인 과거에 천착해 맥락을 상상하는 것이라면, 문학은 완전히 다르게 상상할 자유가 있다. 나에게는 내가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 실제로 그랬던 일이기 때문에, 과거를 단지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다시 쌓을 수가 없었다.

과거의 나에게 그럴 사정이 있었다든지, 과거의 나에겐 그게 최선이었다든지, 그게 최선이었다는 것까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과거의 나의 연속인 나는 고작 그게 최선인 사람, 민폐가 되므로 조용히 빠지는게 최선인 사람인 것 아닌가. 아무리 과거를 이해해도 그 과거의 나가 거기까지라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

과거는 단절되었을 때 비로소 지나간 것이 된다. 새로운 국가, 왕조, 종교가 세워지며 새 시대가 열릴 때. 우리는 많은 것들을 비로소 새롭게 세우고, 새롭게 해석하고, 나아가게 된다. 물론 사람이 자기 인생을 이해하는 것과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과거를 단절하고 새로운 나를 세우는 것이 필요했던 것 같다. 같은 상황, 적어도 과거와 같다고 여겨지는 상황에서 실제로 다른 나를 경험하고 나서야, 그제서야 다른 나가 실제로 생겨났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다. 새로운 나를 나로 삼을 수 있었다. 과거를 드디어 지나간 것으로 보낼 수 있었다.

게다가 그게 한 번에 되지도 않는다. 같은 상황을 겪으면 나도 모르게 과거의 나로 돌아가버린다. 다시 공포에 질리고, 똑같이 공포에 질리는 나를 보며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에 좌절한다. 그 와중에 아주 조금씩만, 처음에는 조금 다르게 보이고, 그 다음에는 조금 더 침착하게 보이고, 그 다음에는 하나만 다르게 행동하고, 그 다음에는 하나 더, 그렇게 지난하게 아주 조금씩만 다르게 경험한다. 그 경험들이 아주 많이 쌓여서 다른 내가 눈에 보일만큼 커졌고, 그제서야 그것을 나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아마 다음에도 나는 어떤 상황에서 과거의 나에 휩싸여 공포에 질리고, 결국 이게 진짜 나고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라며 절망하겠지. 하지만 종이 한장만큼의 다른 내가 쌓일 것이고, 새로운 나라는 아주 느리지만 끊임없이 세워지고 있다. 왜, 공사중인 건물을 보면, 대체 뭘 하긴 하는건가 싶을 정도로 오랫동안 비워져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커다란 건물이 세워져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오늘은 어느 순간 갑자기 커다란 건물이 세워져 있는 것이 보인 날이므로 기록해둔다.